나의 인생 개조 프로젝트 #1.

10/31/2024 굳이 글쓰기. 스물한 번째

 

플래너는 왜 써야 할까요? 아니, 플래너를 꼭 써야 할 만한 이유가 있을까요? 저는 왜 5년이 넘도록 플래너를 개발하고 있고, 또 직접 쓰고 있을까요?

 

자기 계발과 함께 시작된 플래너와의 인연은 제게 참 특별합니다. 플래너를 사용하게 되면서 저는 암담하기만 했던 미래를 소망과 기대감으로 기다리게 되었으니까요. 플래너 사용은 저의 인생과 저희 아이들의 인생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물론 플래너 하나만으로 저의 인생이 변화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꾸준히 노력하며 성장할 수 있었던 결정적인 이유를 하나 꼽으라면 그것은 플래너에 ‘기록’하는 습관입니다.

 

저는 유학 중이었던 남자 친구를 따라 미국에 가기 위해 대학교 4학년 1학기에 조기 졸업을 하자마자 결혼했습니다. 얼굴이 동그라 안 그래도 앳돼 보였는데, 어린 나이에 줄줄이 아이 셋을 낳아 키우는 전업주부가 되었습니다.

결혼만 하면 행복해질 거라 생각했는데, 엄마의 삶도, 전업주부의 삶도, 아내로서의 삶도 모두 만족스럽지 못했습니다. 물론 행복하고 감사한 순간이 더 많았지만, 제 마음은 과거의 상처와, 도태되어 가는 자신에 대한 자괴감과, 미래에 대한 불안함이 점점 더 커져만 갔습니다.

 

남자도 제가 골랐고, 결혼도 제가 좋아서 했고, 아이를 빨리 낳는 것도 제가 선택했는데, 문제는 그 후의 삶에서 저 자신이 점점 사라져갔다는데 있었습니다. 주부의 역할, 아내의 역할, 엄마의 역할, 며느리의 역할 등등… 막상 그 옷들을 입고 보니 제가 선택하지 않았는데도 암묵적 강압과 동의에 의해 떠맡게 된 일들이 늘어갔습니다.

착하게 희생하며 묵묵히 자신의 자리를 지키는 것이 아름답고 선한 것이라는 교회의 가르침을 따랐지만 제 마음은 시간이 지날수록 무너져갔습니다. 가부장적이고 강압적인 사회에서 순응해 살아갔지만, 그렇게 저를 내주었지만, 제가 베푼 선행의 수혜자들에게 있어서 저라는 존재는 가끔 쉽게 무시해도 될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너무 억울했습니다. 저도 배운 사람이고, 그렇게 일찍 결혼하는 것을 선택하지 않았다면 사회에서 공헌하며 인정받고, 경제적으로도 독립된 사람으로 당당하게 살 능력이 있는 사람이었는데, 무능해서 살림이나 하고 육아만 하는 사람으로 취급받는 것이 서러웠습니다.

 

그래서 아이들을 달달 볶기 시작했습니다. 미국 시골은 공부나 입시 경쟁이 없었는데도 저는 한글, 영어 단어, 수학 등 문제집을 구해서 방과 후에 해야 할 숙제를 내주었습니다. 정해준 분량을 끝내면 더 많이 내주기도 했습니다. 아이들이 공부를 잘 하고, 좋은 대학에 들어가, 안정된 직장에 취직해야 저처럼 무시 당하지 않고, 백인들의 사회에서 당당히 설 수 있을 것이라고 막연히 기대 했습니다.

아이들에게 높은 기준과 잣대를 내세우고 가차 없이 몰아댔습니다. 예절이나 학습 수준이 저의 기준에 못 미치면 매도 들고 벌도 세웠습니다. 말로는 사랑의 매였고 아이들을 잘 훈육하기 위한 매였지만, 사실은 솟아오르는 화를 참지 못하고 폭발하는 때도 있었습니다.

 

사실 저의 삶은 아이들에게 세워 놓은 기준만큼 훌륭하지 못했습니다. 축구를 좋아하는 아들에게 기술도 중요하지만 체력을 길러야 한다고 말하고는, 저는 운동하는 걸 정말 싫어했습니다. 마음을 먹고 걷기 운동을 시작해도 며칠 못 가서 무릎이 아프다는 핑계로 그만두기 일쑤였습니다.

아이들에게 동화책을 읽어주고, 책을 많이 읽으라고 가르쳤지만 정작 저 자신은 책을 거의 읽지 않았습니다. 아이들에게는 열심히 공부해서 훌륭한 사람이 되라고 했지만, 저는 암기력이 나쁘다는 핑계로 어려운 시험을 요구하는 직업은 도전할 엄두도 내지 못했습니다.

저의 부정적 감정 언어는 “열 받아, 짜증 나, 속 터져” 등으로 한정되었습니다. 아이들이 자라감에 따라 요구 사항도 많아지고, 더 까다로워지고, 사사건건 트집을 잡는 저의 태도로, 아이들의 여린 가슴에는 제가 박은 못이 하나둘 늘어갔습니다. 아이들과의 갈등의 골이 조금씩 깊어져 갔습니다.

 

이러한 저의 모습을 보며 저는 자괴감에 빠졌고 원망이 늘어갔습니다. 제가 이렇게 무능하게 된 것은 부모님이 가난했기 때문이라고 핑계 댔습니다. 제가 아이들에게 화를 참지 못하는 무서운 엄마가 된 것은 지나치게 엄격했던 아빠 때문이라고 탓했습니다.

저는 점점 상대적 박탈감과 비교 의식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저보다 더 많이 배우고, 사회에서 인정받는 경력을 갖고 있고, 돈이 많고, 멋있어 보이는 사람들과 거리감이 느껴졌고 저 자신이 참 초라하게 보였습니다.

그러나 제가 주도적으로 저의 삶을 변화시키려는 의지는 별로 없었습니다. 문제는 제가 아니라 저의 남편이었고, 저의 아이들이었고, 은혜를 모르는 그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정말 총체적 난국이었죠?

 

그러다가 남편의 협조로 신학 대학원에 입학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첫째는 8살, 둘째는 5살, 막내는 3살이었네요. 여러 우여곡절이 있었고, 배워도 뭘 배운 건지 모를 때도 많았지만 어찌 되었든 졸업도 했습니다.

감사하게도 어느 학과목 부교재였던 <비폭력 대화 Nonviolent Communication> 책을 통해서 저 자신이 저의 삶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중요한 사실을 배웠습니다. 제 생각과 말과 행동뿐만 아니라 저의 감정까지 저의 선택이며, 그래서 제가 느끼는 감정이 저에게 책임이 있다는 것은 너무 충격적이었습니다.

이게 시작이었습니다. ‘자신의 인생에 책임을 지는 삶.’ 이것이야말로 정말 ‘성숙한 자의 삶’이라는 진리를 서른이 넘어서야 깨달았습니다. 저는 <비폭력 대화>로 저 자신을 치유하고 위로하며, 저의 감정에 책임을 지는 법을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아이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아이들의 마음도 치유하기 시작했습니다.

 

오늘은 여기에서 이야기를 마무리할게요.

제가 본격적으로 플래너를 만들고 쓰게 된 이야기는 다음번에 들려 드리겠습니다.

이렇게 부족한 사람도 변화되었습니다. 이런 저와 함께 성장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행복한 하루 보내시구요~

또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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